안경의 역사

안경의 기원(起源)과 발달사(發達史)

1-1-1. 우리나라 안경의 역사
우리나라에 안경이 전래되었을 시점인 조선시대에는 장유유서의 질서와 반상의 차이가 엄격해서 안경 착용에 따른 제약이 많았으며 선대가 쓰던 안경은 후대에 대물림하지 않은 관습이 있었다. 이수광(李?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제19권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고관 심유경과 일본의 승려 현소가 모두 늙은이인데도 안경을 썼기 때문에 작은 글씨를 거뜬히 보았던 데 좌중이 놀랐고 이는 여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렌즈는 수정으로 만들고 테두리는 해방(조개의 일종)의 껍데기로 만들었다. 장청은 『방주잡지』에서 선조가 내린 안경에 대해 “안경은 돈짝만한 크기의 두 개의 알로 되어 있고, 그 알의 생김새는 운모석과 같으며, 금으로 알의 테두리를 감쌌고, 노끈을 매어서 합치면 하나가 되고 펼치면 둘이 되며 그 품위가 마치 저자의 등자갑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실록』 52권에“내 시력이 점점 옛날만 같지 못하다. 도서나 서류를 보는데 안경이 없으면 분별하기 어려우니, 안경은 이백 년 전부터 처음 있던 물건이다”라고 수록되어 정조가 이 땅에 안경이 비롯된 시기를 16C 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봉 김성일의 안경과 황윤석의 『이재전서(?齊全書)』 등으로 미루어 대략 임진왜란 전인 1580년경 안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보면 정조실록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김성일(金誠一)이 생전에 사용하던 안경이 1984년 7월 경북 안동시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1577년 김성일이 명나라에 갔을 때 이미 중국에 전해진 안경을 구입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는 문화의 혜택을 베푸는 나라로서의 자긍심이 높아 예물을 받지 않았고, 구입한 물건도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기록과 김성일의 안경이 일본의 것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는데 기인한다. 안경의 코다리(Bridge) 아랫부분 모양은 조선시대 청화백자 목 부분의 띠 모양을 닮고 있으며 위는 넓게, 밑은 위로 올린 동그란 선이 가늘게 제작되어 있어 조선 특유의 투박함과 섬세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안경집은 가벼운 피나무로 만들었고 겉면에는 놋쇠로 된 배꼽장식이 있으며 겉은 옷칠이 되어 있고 속은 텅 빈 상태 그대로 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 공예품과 같은 처리기법이어서 중국의 안경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1-2. 안경에 대한 인식
안경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신체의 중요기구인 눈의 기능을 보정하는 도구로 과학적이고 긍정적 인식을 갖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음양오행 사상에 의해 “사람은 양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낮에는 보고 밤에는 보지 못한다”는 정도의 관념적 인식만을 가져오다가 의학적인 눈의 연구는 『성혜방(聖惠方』이 발간될 무렵에야 가능하였다. “눈동자란 천지일월을 본받은 것이다. 천지가 푸르고 맑으면 일월이 밝고 천지가 어두우면 일월도 어둡게 된다”고 하여 눈동자의 기능과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에 이르러 그가 저술한 『마과회통(麻科會通)』 「의령(醫零)편」에서 현대의학에 근접하는 새로운 이론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눈의 근시와 원시는 ‘눈동자가 평평하느냐 튀어 나왔느냐’는 평돌(平突)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소년으로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눈동자가 튀어나와 가까이 보는데 유리하고, 노년에 이르러 혈기가 위축될 때는 눈동자가 평평하여 눈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1846년 헌종 때 발간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볼록렌즈의 일종으로 보여지는 화주(火珠)에 대하여 기재되어 있고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攷辯)』에는 19C 초 유리를 이용하여 광학적 렌즈를 제작한 기록이 있다. 또한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안경의 원형인 애체(??)에 대하여 “애체는 흡사 운모와 같고 금으로 테를 둘렀으며 자루가 달렸다. 오므리면 하나가 되고 펴면 둘이 되었는데 노인이 두 눈에 걸면 글자가 크게 보인다”라고 논하였다. 이수광(李?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안경의 기능과 소재,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안경은 노인이 책을 볼 때 쓰는 것으로 작은 글자가 크게 보인다. (중략) 안경은 해방(조개 이름) 등이 쓰이는데 그 껍질로 만든다고 한다. 살피건대, 판별하기 어려운 낡은 문서는 수정으로 햇빛에 비추어 보면 분별할 수 있다”

1-2. 우리나라 안경의 종류
안경은 안경알, 안경테, 귀걸이, 그리고 이를 넣어두기 위한 안경집과 이를 매달기 위한 매듭들로 구성된다. 1981년 월성군 성부산 기슭에서 국내 최초 유리 제조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신라 때의 용광로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이 때 벌써 우리 선조들이 소다유리와 언유리를 직접 생산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규경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攷辯)』에 자수정 곧 유리구슬을 이용한 가수정(假水晶) 제법을 설명하면서 안경을 진수정(眞水晶)과 가수정을 이용해서 만든다고 했다. 안경알의 형상은 오늘날과 달리 거의가 둥근 원형이었으며 보안용 편경으로는 타원형도 있었는데 이는 주로 여성용으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경주 남석안경의 예를 보면 볼록렌즈에는 반드시 백수정만을 사용했었으며 그 가공의 어려움 때문에 지금과 같이 양면을 볼록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한 쪽 면만 볼록하게 만들었다.

1-3. 안경테와 안경다리
안경테는 재료에 따라 우각테(소뿔), 나무테, 대모테(거북등껍질)가 있었고 19C 이후에는 금테, 은테, 백동테, 유기테 등이 등장했으며 점차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으로 바뀌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속이 차지 않고 색깔이 연갈색이며 고르게 퍼진 암소뿔을 사용한 우각테 안경이며 나무테는 재질이 단단하고 습기에 강한 대추나무를 사용하였다. 안경테의 모습은 처음에는 두 개의 안경알을 가운데 코걸이에 대못을 박아 옆으로 비켜 접을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안경 착용이 대단히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잠시 꺼내서 작은 글자를 보는 데만 사용하였으므로 굳이 얼굴에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안경다리는 없고 끈을 꿰어 귀에 고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튼튼하고 대단히 장식적인 구름이나 불로초문양의 코다리를 만들어 사용하고 안경다리는 만들지 않았다. 차츰 장시간 쓰기위해 끈을 매어 사용하되 머리 뒤로 묶거나 망건 등의 모자에 묶기도 하다가 차츰 안경다리를 만들어 썼는데 모두 중간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0세기 들어와 귀걸이가 낚시 바늘처럼 둥글게 만들었으며 요즈음과 같은 “ㄱ자” 귀걸이 안경다리는 한참 뒤에 만들어진 일이다.

1-4. 안경알 수정
안경테를 만드는 소뿔은 구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안경알을 만드는 수정은 채취, 가공이 어렵고 값이 비싸 서민들은 안경을 쳐다보기만 할 뿐 벼슬아치나 돈 많은 사람이 쓰는 실정이었다. 종로 북쪽에 있던 안경방(眼鏡房) 진열품 중에서 경주 남석의 원석을 최고로 여겼으며 고종 때는 안경방이 각처에 있다고 했으니 안경을 이용하는 서민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안경 렌즈로서 특히 수정을 소중히 여겼고 각종 색안경을 좋아했으며 특히 경주남석을 고급으로 여겼다. 경주남석안경은 경주에서 채굴된 옥돌(일명 남옥,수정)을 이용해서 렌즈를 만들고 귀갑(龜甲,거북등껍질),우각(牛角, 소뿔), 금속 등으로 테를 만든 것이다. 경도가 높아 쉽게 깨지지 않고 온도에 잘 반응하지 않아서 여름에는 눈을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주며 온도차가 커져도 김이 서리지 않는 등 1600년대 초부터 중국에서도 최고의 상품으로 명성을 떨쳤다. 근래에 이르러서도 특산품 안경으로 각광을 받으며 우리나라 안경 역사의 큰 맥을 형성해 왔으나 원석채취가 한계에 달하여 공급이 중단된 상태이다.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코리언 스케치』에 수록한 일화에 의하면 남석안경은 생활필수품을 팔아야 살 수 있을 만큼 비싼 것이었다. 안경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량 생산되기에 이르자 가격도 하락했는데 1939년도에는 최고 80원에서 최저 2원짜리까지 다양한 제품이 유통되었다.

1-5. 안경집
안경집은 안경의 보호와 휴대를 위해서 넣어두는 집이다. 초기에는 보호와 휴대의 기능 위주였으므로 위쪽에 고리를 단 세로로 된 편병형 통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미적인 요소를 더하게 되어 예술품의 경지에 이르는 섬세한 조각과 그림, 색채를 가미하여 하나의 장식품으로서 역할도 하게 되었다. 오복을 기원하는 장수와 부귀공명, 경전의 명구(名句), 유명시인의 시구(詩句)를 인용하는 문자나 그림문자, 화조(花鳥), 초충(草蟲), 십장생, 유불선 사상에 입각한 신선을 새기거나 수를 놓아 시각적 미감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 사는 봉황과 용을 그리거나 상징하는 문양을 사용하여 왕실을 나타냈고 중인들은 목재나 생선껍질을 말려 문양을 넣거나 테를 둘러 장식을 하는 등 휴대한 안경집에 따라 신분이나 재산의 정도를 나타내는 특이한 기능도 하였다. 안경집을 만드는 재료도 초기에는 안경을 보호한다는 기능에 충실하기 위하여 자단과 같은 견고한 나무 등을 주로 이용했으나 점차 금속, 어피류, 가죽 등을 도입하였다. 초기의 안경집은 휴대가 간편한 형태로 안경을 반으로 접어 넣을 수 있도록 비단 등으로 싸서 만들거나 바탕 자체를 고급나무, 유기, 금속 등으로 만들었다. 안경이 보편화되면서 안경집은 커지고 다채로운 모습을 띄게 되었다.

1-6. 안경과 예법
안경의 예의범절은 매우 까다로워서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안경을 쓰면 안 되었고 신분이 높거나 연장인 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의 그림 중에는 안경 낀 작품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다만 임방 (任?, 1640~1724년)의 초상화에는 서탁 위에 안경이 놓인 상태로 묘사되었을 뿐이어서 안경 착용에 대해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잘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이규경(李圭景)은 그의 저서『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우리의 관습으로 안경은 지체가 높은 어른 앞에서는 쓰지 못하며, 젊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도 쓰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자질구레한 예절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여 비판적 시각을 나타냈다. (國俗以眼鏡爲尊貴前不得着 少年賤者不得張 則果禮節之濫觴也)

1-7. 안경에 얽힌 일화
운양호 사건 결과 1783년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가게 된 김기수(金綺秀)는 일행에게 모두 안경을 끼게 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우월함을 일본인들에게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지체가 높은 사람만이 누구 앞에서나 안경을 착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播遷) 중인 고종을 서재필이 안경을 낀 채 알현하여 친노파 이범진으로 하여금 알현하는 자세가 무례하다는 모략을 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1882년 뮐렌도르프는 고종을 배알(拜謁)할 때 안경을 벗고 큰절을 세 번 하여 왕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중임을 맡게 되었다. 헌종 때 조병구(趙秉龜)는 이조판서로 조대비의 친정 동생이며 헌종의 외숙이었다. 눈이 부실하여 안경을 낄 수밖에 없었는데도 궁중 출입 시 안경을 벗지 않아 헌종의 책망을 받고 고민 끝에 자살하였다.

1-8. 안경알 모양과 변천
안경알 형태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원형(圓形) →타원형(?圓形) →횡장형(橫長形) 등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경이 만들어진 처음부터 둥근 모양이 오랫동안 즐겨 사용되어 오다가 약간의 변형 형태로 발전한 것이 타원형이다. 눈모양으로 개발된 안경알은 사이즈별로 호칭이 붙여질 정도로 매우 활발히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종경(縱經)이 짧고 횡경(橫經)이 길며 장방형(長方形)을 하고 있는 횡장형의 안경알이 등장하여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안경알이 나타날 때는 꽤 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점점 대형으로 진보되어서 어느 정도에 달하면 다음의 모양이 나타나서 바뀌는 것이 보통이다.

1-9. 안경의 발달
안경 착용 시의 많은 제약과 안경에 대한 폐쇄적인 사고 때문에 우리나라의 안경은 커다란 발전을 이루지 못 하였다. 조선조 중엽에 전래된 안경은 17세기경에 우리의 손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극히 소량으로 생산되어 제한된 일부 계층에게만 보급되었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안경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하였으며 사대부 등 높은 신분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안경의 생산과 보급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안경이 나름대로의 자리를 찾고 발전을 이룩하게 되기까지는 백여 년의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영조(1694~1776년)때부터 발전을 시작한 안경은 이후 세간에 널리 퍼져 정조(1752~ 1800) 때에는 임금도 노년에 안경을 사용하는데 이르렀다. 통신사와 사신들에 의해 중국과 일본의 산물이 국내에 들어올 때 안경도 다량 유입되어 경주남석안경과 함께 시중에 보급되었다.

1-10. 안경의 보급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조엄(1719~1777년)이 1763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저술한 『해행총재(海行摠載)』에는 안경 거래에 관한 기록이 있다.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오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 진귀한 물품이 많이 소개되었고 이때 안경도 다량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수입된 안경은 경주남석안경 등을 직접 제조하여 판매하는 안경방(眼鏡房)이나 부피가 적고 가벼우며 비교적 값진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저자(시장)나 촌가(村家)로 다니는 보상(褓商) 등을 통하여 시중에 보급되었다.

1-11. 우리나라의 안경문화
안경을 착용하여 본인의 표정을 숨길 수 있으므로 예전에는 매우 까다로운 예법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나설 때에는 안경을 벗어야 하며 자신보다 신분이 높거나 연장자인 어른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할 수 없었다. 또한 여자가 안경을 낀 것을 매우 건방지게 여겼다. 이는 노인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젊은 사람이나 비천한 계급의 사람이 안경을 착용하면 큰 무례를 행하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안경이 일반 백성에게도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사람들이 신분이나 부의 과시로 값비싼 안경을 소지하는 풍조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동서양을 막론한 인류보편적인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부의 상징과 더불어 권위주의적인 면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1-12. 캐나다 에비슨(Avison, Oliver)의 기여
우리나라의 안경 역사가 근대적인 의미에서 그 전환기를 맞이하는 데는 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했던 서양의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캐나다 선교사 에비슨(Avison, Oliver)이 1893년 광혜원 원장이 되어 1904년 세브란스병원 개설시 렌즈연마기를 설치한 안과를 개설함에 따라 과학을 수용하는 새로운 단계의 안경관을 갖게 되었다.


2. 중국 안경의 역사
몽고지방에서 모랫바람을 막기 위해 안경을 사용하였다는 설화 이외에도 고대 중국 대륙에서 빛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있었음은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묵가는 평면경, 오목경, 볼록경을 이용하여 빛의 반사현상을 관찰하거나 물체의 상의 크기 및 위치와 사용한 거울의 곡률과의 관계를 밝히는 경험적 법칙을 이끌어 냈다. 묵자는 “물 속에 들어 있는 바늘의 크기는 물에 잠겨 있는 부분이 남아 있는 것처럼 된다. 그 원인은 보이는 부분 (겉보기) 때문이다”라는 과학적 사실을 밝혀냈고, 940년 경 담초는 그의 저서 『화서』에서 규(양오목렌즈), 주(양볼록렌즈), 지(평오목렌즈), 우(평볼록렌즈) 렌즈를 사용한 경험을 밝혔다. 또한 1117년 유기가 쓴 『강리기』에도 판관들이 자신들의 표정을 피고에게 숨기기 위해 연수정으로 된 흑안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AD 1204년에 발간된 조희곡(趙希鵠)의 『동천청록(洞天淸錄)』에서는 “애체(??)는 커다란 화폐와 비슷한 것으로 색깔은 운모와 같다”고 하여 중국인이 안경의 용어로 썼던 애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노인의 눈동자가 시력이 쇠퇴해져 작은 인쇄물을 읽을 수 없을 때 눈 위에 애체를 걸면 글자를 두 배나 명료하게 보게 된다. 애체는 서방의 마라카에서 왔다”고 하여 안경을 사용한 사실과 전래국을 명시하고 있다.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원나라에서 관직을 맡았던 마르코 폴로(1254~1324년)는 그가 저술한 『동방 견문록』에서 “원나라의 늙은 신하들은 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볼록렌즈 안경을 끼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은 문헌상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서 안경이 사용된 시기는 이태리에서 안경이 발명된 1280년 경보다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르코폴로가 기술한 내용에 의하면 그가 중국에 들어가기 전부터 중국에서는 안경이 일부 계층에서나마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 발견되지 못하여 아직도 안경은 이태리에서 발명되어 유럽과 동양에 전파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3-1. 유럽 안경의 역사
서양에서는 일찍이 BC 400년대에 빛의 굴절현상을 발견하였고 10C 말에는 확대렌즈에 대한 이론을 완성하였다. 아랍의 물리학자요 수학자인 알하젠(Alhazen,965~ 1039년)은 그의 저서 『시각론』에서 “빛에 의해 물건이 보이는 것은 물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사람의 눈속에 들어오기 때문”이고 “렌즈의 구(천연 구슬이나 유리 혹은 투명한 공)에 광선이 통과하면 그 광선은 항상 그 구의 지름 4분의 1정도 구면(球面)보다 떨어진 곳에 모이며 투명한 광물로 만들어진 구체(球體)는 물체를 확대시켜 보인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 이론은 2C 후 영국의 로저 베이컨에 의해 발전되어 안경의 발명에 기여하였다. 13C 말 유리알을 사용하여 작은 글씨를 크게 볼 수 있는 그라움렌즈가 개발되어 1267년 이 렌즈로 만든 안경이 로마교황 클레멘스 4세에게 바쳐지면서 베니스에서 최초로 안경이 발명 된 것이다. 유럽의 볼록렌즈이론이 이탈리아로 전파되어 베니스나 플로렌스의 유리산업과 결합함으로써 유리 직인(職人) 동업조합 규약에 명기된 “Roidi da Ogli”라는 안경렌즈의 발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또 1301년 베니스의 고등회의 게시를 보면 “안경알로서는 수정대신 유리를 못쓴다”라는 기록이 있고 조르다노 다 리발트의 설교문에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기술 중 하나인 안경 만드는 법을 발견한 것은 아직 20년도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어 안경이 1280년경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1352년 톰마소 다 모데나가 그린 「안경을 쓴 우고네 추기경의 초상화」가 있으며 플랑드르 출신 화가 아이크가 1400년을 전후하여 그린 그림에도 안경이 등장한다. 1480년 도메니코 길란다죠가 그린 「성 제럼의 초상화」에도 안경 낀 모습이 그려졌고 1517년 라파엘이 그린 「로마교황 레오10세의 초상화」에도 오목렌즈의 근시 안경을 쓴 모습이 그려져 있다.

3-2-1. 렌즈의 역사
렌즈는 지름이 약 5mm되고 앞뒤가 똑같이 볼록하면서 둥글고 납작한 옛날 로마시대 콩의 모습에서 유래한 라틴식 이름이다. 이 콩은 “렌즈 에스쿨렌타”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불콩 또는 중국의 편두 따위와 비숫하다. 렌즈는 13세기 후반 로저 베이컨에 의해 그 작용에 대한 신비가 벗겨진 후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대인들이 사용했다고 추측되는 렌즈는 수정을 비롯하여 맑고 투명한 보석 또는 유리를 통통하고 볼록하게 연마한 물건으로 일부 지배계층의 장신구로 쓰였다 키케로(Cicero, Marcus Tullius, BC101-BC43, 정치가, 웅변가)는 만년에 시력이 극히 감퇴되어 독서를 제대로 할 수 없었으므로 똑똑한 노예를 골라 글을 가르친 후 그가 읽고 싶은 책을 큰 소리로 읽게 하여 책 읽기를 대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키케로가 렌즈를 광학적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고 장신구로 사용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당시 렌즈의 가격은 대단히 비싸 지식이나 권세를 가졌던 성직자나 귀족 계급만이 렌즈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C 말부터 급성장한 유리산업의 영향을 받아 14C 부터는 유리가 렌즈의 재료로 쓰이게 되면서 일반화 되어 일반 대중도 렌즈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3-2-2. 렌즈의 발달사
이탈리아에서 13C에 일어났던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기술자를 탄생시켜 두 개의 렌즈를 조합하여 몸통이 없는 망원경을 만들게 하는 등 당시의 광학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다. 네덜란드의 한스는 1608년에 굴절망원경을, 얀센은 현미경을 만들어 1609년 7월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년)가 9배의 배율을 가진 망원경을 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의 천문학자인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년)는 대물렌즈, 접안렌즈를 고안했으며 1611년에 발표한 저서『굴절광학』에는 지상용 망원경의 원리와 제작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영국의 과학자 뉴우턴(Newton, Issac, 1642~1727년)은 렌즈 연마에 피치(pitch, 톱니바퀴)를 최초로 이용하였으며 1672년 3월 25일 『물리학 보고서』에 「새로운 망원경에의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1668년에 제작한 반사망원경에 대해 기록하였다. 1889년 독일의 아우구스트 뮐러는 각막에 부착시키는 콘택트렌즈의 굴절 이상을 바로잡는 데 성공하여 실용화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모리츠 본 로어는 1908년부터 1921년까지 걸스트랜드가 개발하여 사용했던 케이트랄 렌즈를 한층 더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 독일 칼짜이스사가‘푼크탈 렌즈’를 시중에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1935년 제작에 성공한 플라스틱 렌즈는 잘 깨지지 않고 가벼워 렌즈의 신기원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3-3. 콘택트 렌즈의 역사
1508년 이탈리아의 발명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콘택트 렌즈의 기원이 된 중요한 실험을 하였다. 얇은 벽의 커다란 둥근 유리 항아리를 만들어 이 속에 물을 가득 채우고 홍체와 수정체 비슷한 유리알을 넣은 겉면에 자신의 눈을 바짝 댐으로써 이루어지는 광학계를 하나의 모형안으로 연구하였던 것이다. 1888년 안과의사 오이겐 픽은 안과학 논문집에 처음으로 「콘택트 렌즈」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토끼의 눈으로 석고의 거푸집을 뜨고 이 거푸집에 유리를 불어서 렌즈를 만든 다음, 2%의 포도당 용액을 떨어뜨리면서 이 렌즈를 토끼의 눈에 끼워 넣는데 성공하였다. 1889년 아우구스트 뮐러는 비로소 처음으로 각막 렌즈라는 명칭을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이 콘택트렌즈로써 굴절이상을 바로 잡는데 성공하였다. 1892년 칼 짜이스 회사의 에른스트 압베는 처음으로 연마된 콘택트렌즈를 만들었고 1920년 뷜헬름 쉬톡은 원추각막에 사용하기 위하여 네 가지의 원추각막용 콘택트렌즈 세트를 만들었다. 1937년 윌리엄 펜블룸은 합성수지를 사용하여 각막 부분은 유리, 공막부분은 플라스틱으로 된 새로운 콘택트렌즈를 만들어냄으로써 렌즈를 공막에 달라붙게 하고 렌즈의 두께와 무게를 얇고 가볍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1947년 노먼 비어는 렌즈의 공막과 각막 이행부에 구멍을 뚫거나 홈을 판 “Ventilated 콘택트렌즈”를 만들어 냈다. 1952년에는 존게스, 1954년에는 디킨슨 등이 지름이 작은 얇은 마이크로렌즈를 선보였고 1958년 뉴턴 웨슬리는 스페르콘이라는 2초점 콘택트렌즈를, 1959년 스테펜 팰리는 다초점 콘택트렌즈를 고안해 냈다. 1960년 위체텔과 림은 부드럽고 투명하여 산소의 투과가 가능한 합성 물질 메틸 아크릴산의 합성에 성공하여 신축성이 뛰어나고 이물감이 없으며 내구성 또한 뛰어난 ‘겔 콘택트 렌즈’를 만들어냈으니 이 렌즈가 바로 소프트 콘택트 렌즈이다. 최근에는 신축성이 매우 뛰어난 실리콘 렌즈도 개발되었다

3-4. 서양 안경 형태의 변천

3-4-1. 대못안경(Reveted Spectacles)

13C 말 베니스에서 최초로 제작되었던 안경은 나무나 뿔 혹은 뼈로써 테를 만들어 수정이나 유리로 된 둥근 렌즈를 끼워 넣은 단안경(單眼鏡) 두 개를 대못으로 연결시킨 것이었다 1352년 이탈리아 화가 토모소 다 모데나가 그린 성니콜라사원의 「위고 대주교의 초상화」는 대못안경을 끼고 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대못안경은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안경의 전형적인 형태로 남아 15C 후반에도 모양은 변함없고 그 재료만 부드러운 가죽을 이용한 가죽안경이 출현하였다. 당시의 안경 값은 매우 비싸 상류계급의 성직자, 학자, 법률가, 귀족 등만이 사용할 수 있어 부와 명예, 학식을 상징하는 표징이 되어 귀족, 왕족, 사제들의 초상화에는 무슨 표식이라도 되는 양 등장하고 있다.

3-4-2. 모자 안경
15C 말 대못안경에 대한 개선방안으로 개발된 것으로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5C 이탈리아 화가 피자노의 그림에는 모자에 부착된 안경을 볼 수 있다. 모자 안경은 소유자의 모자에 안경이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대개 상류층의 사람들이나 여자들이 즐겨 사용하였다.

3-4-3. 브릿지 안경(Spectacles with a rigid bridge)
당시 대못안경과 함께 유행했던 또 하나의 안경으로 아아치나 브릿지로써 두 개의 단안경을 연결시킨 모양을 하고 있다. 이렇게 브릿지나 아아치를 이용하여 안경테를 하나로 간편하게 만든 것은 지금의 귀걸이식 안경의 모양이 개발되게 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4-4. 구멍난 브릿지 안경(Spectacles with a slit bridge)
17-18C에 크게 유행한 안경으로 코에 오는 압박을 제거하고 흘러내려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브릿지에 틈을 만들어 구부리기 쉬운 막대를 끼워 넣은 것인데 영국인들은 이를 스펙터클스(SPECTACLES)라고 하였다.

3-4-5. 실이나 리본을 매단 안경
16C 경 스페인에서는 브릿지안경의 착용에서 오는 불편을 덜 목적으로 안경귀에 실이나 리본을 머리 뒤에서 묶든가 귀에 두르고 끈을 맨 아래에 추를 달아 안경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3-4-6. 외알안경
16C 손지갑이나 포켓에 손쉽게 넣을 수 있는 작고 간편한 안경의 필요성에 따라 독서 보조기구로 뿔을 재료로 하여 제작되었다. 초기에는 시력교정용으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금, 은 등을 세공하여 상류사회의 사람들이 하나의 유행으로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다. 안와(眼窩)에 외알안경을 끼우기 쉽고 안구(眼球)에서 조금 떨어진 부위에 고정시키기 위해 테 부위에 갤러리를 붙인 갤러리안경도 개발되었다.

3-4-7. 가위 안경(Scissors Spectacles)
안경을 착용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위모양의 안경이 개발되었는데 15C 경 이탈리아에서 처음 제작되어 18세기에 이르러 크게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복잡 화려함을 추구한 바로크 양식이 안경의 제작에도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가위안경의 애용자를 예로 든다면 독일의 문호 괴테,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등이 있다.

3-4-8. 로니에트(lorgnette) 안경
가위안경이 변형되어 손잡이가 달린 안경으로 발전되었다. 1780년 경 영국의 안경상 조오지 아담스(George Adams)가 손잡이 달린 안경을 개발한 이후 영국의 안경상들에 의해 발전을 계속하였다. 용수철을 두 개의 렌즈 사이에 끼워 넣은 손잡이 달린 안경으로 만들어져 오페라 관람에도 사용됨으로써 오페라안경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1825년 R.브뤼텔 배트가 접으면 외알안경처럼 간소해지는 안경을 만들어 특허를 취득함에 따라 본래 안경을 착용하지는 않지만 사물을 확실하게 볼 필요가 있는 멋쟁이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3-4-9. 오페라 안경의 역사
1608년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오목렌즈를 사용하여 쌍안경으로 만든 것이 오늘의 오페라글라스이다. 1609년 볼록과 오목렌즈를 끼워 맞춤으로써 갈릴레이식 굴절망원경을 만들었고 1668년 뉴턴이 대물렌즈로 오목거울을 사용하여 반사망원경을 발명한 이후 19C 중엽 유리 표면에 은을 입히는 도금법이 개발되어 유리반사경을 사용한 반사망원경이 제작되었다.

3-4-10. 스카알렛(Edward Scarlette) 안경
1728년 런던의 안경상인 에드워드 스카알렛이 철사를 이용하여 긴 다리를 만들고 끝부분을 동그랗게 감아서 귀에 고정시켰다. 안경다리의 발명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안경을 착용할 때마다 느껴야 했던 얼굴과 머리의 압박감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난 1752년 런던의 안경상 제임스 야스코프(James Ayscough)가 두 번 접을 수 있는 안경다리를 만들어 더욱 단단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3-4-11. 코 안경
19C 후반 가벼운 메탈을 사용하여 코에 닿는 부분(코받침)을 스프링이나 쿠션을 대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테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렌즈도 원형, 반달형, 타원형으로 만들어 남녀 모두에게 인기를 끌었다.

3-4-12. 무테안경(無樺眼鏡, Glass Spectacles)
유리안경(Glass Spectacles)이라고도 불리는 이 안경은 1840년 경 오스트리아 비인의 안경상 발트슈타인(Walds tein)이 만들었다. 렌즈를 감싸는 테가 없으면 깔끔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세련된 사람들이 즐겨 착용하였으나 렌즈와 브릿지, 안경다리만으로 구성되어 깨질 위험이 상당히 컸다.

3-4-13. 스파이안경
나포레옹의 화약통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통모양이나 부채모양의 안경이다.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상대방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부끄럼 많은 사람이 연인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대각안경이나 상대를 빤히 응시하지 않고도 상대의 행동을 볼 수 있으며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질투안경 등이 있다.

3-5. 시대 변천에 따른 안경(14C~20C)

3-5-1. 14C 안경
최초의 두알 안경은 압정으로 고정한 두 개의 외알렌즈(혹은 확대 렌즈)였다. 초기의 이러한 안경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어서 손에 들고 보든가 혹은 조심해서 코 위에 얹어야만 했기 때문에 항상 착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가까이 볼 경우에만 사용하였다.

3-5-2. 15C 안경
초기의 안경 프레임은 놋쇠나 철로 만들었고 얼마 뒤에는 뿔이나 뼈, 금, 니켈, 은 등을 사용했으며 말기에는 가죽으로 만든 안경도 나왔다. 안경이 가치 있는 귀중품이라는 점에서 안경집도 중요성이 강조 되었으며 예술작품으로 변모해 갔다.

3-5-3. 16C 안경
16C가 되자 안경은 동전에 새겨질 정도로 중요성을 갖기에 이르렀고 그만큼 동경(憧憬)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최초의 것은 16C 초의 덴마크 금화로, 거기에는 “신의 신비한 기적을 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1510년경의 것이라고 전해지는 계란형 렌즈는 근시용 렌즈로 멀리 있는 것을 확실히 보기 위해 생겨났는데 크고 둥근 렌즈는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뿔로 된 안경테는 1582년에 프랑스에서, 1585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16C 초 독일에서도 안경테의 소재로 뼈 대신에 뿔을 사용하였다.

3-5-4. 17C 안경
17C에는 프레임과 렌즈라는 두 가지 면에서 현저하게 정교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안경이 대량 생산되어 가격이 저렴해지고 멋쟁이들은 퍼스펙티브 글라스(Perspect ive Glass)를 애용하였다. 퍼스펙티브 안경은 초기의 외알렌즈보다 소형이고 렌즈도 독서용보다 먼 곳을 보기 위한 것이 많았으며 끈이나 리본으로 가슴에 늘어뜨리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3-5-5. 18C 안경
18C에는 안경 발전사상 여러 가지 진보가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경을 안정시키는 실용적인 수단의 진보였다. 안경다리는 1727년~1730년 사이에 런던의 안경상인 에드워드 스칼렛이라는 인물에 의해 완성되어 크게 개량 되었다. 초기의 다리 달린 안경은 강철 제품이었고, 대부분 원형 렌즈가 붙어 있으며, 머리에 꽉 눌러서 안경을 고정하는 대형 바퀴가 앞에 붙고, 안경다리가 경첩으로 고정된 것이다. 1794년 아드리안 랠리의 그림이 네덜란드 화랑에 있는데, 끝부분이 하트형으로 된 작은 다리가 달린 안경을 쓴 신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손잡이가 달린 외알안경은 18C에 특히 유행했다. 영국인이 ‘프로스펙트 글라스’라고 부르고 프랑스인이 ‘로르네트’라고 부르는 소형 망원경이 사교계 남녀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유행하는 로르네트 중에서 예술가나 직인(職人)이 금, 은, 나무, 상아, 도기, 웻지우드 도기, 가죽, 에나멜, 보석 등으로 장식한 것은 실용적인 가치와 함께 예술 작품으로서도 귀중한 것이었다.

3-5-6. 19C 안경
19C 초에는 프랑스제 로르네트 혹은 소형 스파이 안경이 크게 유행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서양 배 모양의 스파이 안경이 사용되었으며, 나폴레옹의 화약통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통모양의 것도 인기가 있었다. 장식은 18C에 비해 우아하지는 않아도 색채는 선명해지고 있었다. 1820년경이 되자 프랑스풍의 부채형 스파이 안경은 소형 만화경이 대신하게 되었다. 1859년 「광학신문」 광고를 보면 뗄 수 있는 손잡이를 돌리면 간단히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만들어진 오페라 글라스가 나와 있다. 세기 말이 되자 외알안경은 손잡이에 의지하지 않고 착용할 수 있게 되었고 모양도 원형이 되었다. 19C 초에는 렌즈가 대형 원형이었지만 마침내 소형 원형으로 바뀌고 훨씬 나중에는 팔각형, 장방형, 계란형이 되었다. 1890년대가 되자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이중초점렌즈가 눈에 띄게 사용되게 되었다. 코안경은 1840년대에 나온 것으로 19C 후반에는 인기가 많아서 남녀 모두 그것을 착용할 수 있게 되었다. 코안경은 한두 나라가 아닌 서구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3-5-7. 20C 안경
20C에 있어서 안경은 과거 6C에 걸쳐 발전 진화된 것보다 훨씬 상회하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이중초점, 4중초점안경이 완성을 보게 되고 콘택트렌즈가 개발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렌즈 크기는 작아지고 불편함은 최소가 되었다. 그 당시 안경 프레임을 만드는 데 사용된 소재는 금, 은, 강철, 놋쇠, 니켈, 주석 합금 등이었다. 1916년 경에도 무거운 렌즈의 안경이 변함없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1923년에 라일란드에 의하면 금도금 안경테가 강철이나 금보다 훨씬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보쉬 & 롬 회사는 크룩스 글라스 렌즈를 만들었다. 이것은 옅은 색, 중간색, 어두운 색의 세 가지 색조로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선글라스이다. 1940년대 초까지는 여러 가지 콘택트렌즈가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비교적 대형이어서 장시간 안경을 착용할 수 있는 물품은 아니었다. 1947년 「비지니스 위크」지는 선글라스의 유행에 주목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두운 색의 안경은 맹인의 표시였다. 그런데 헐리우드가 그것을 완전히 유행시켜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노인도 젊은이도 한결같이 갈망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플라스틱 안경 프레임에 기묘한 모양과 색깔의 렌즈를 끼운 것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1960년 초 손님의 60%가 “내구성이 강한 안경 프레임”을 원하고 있으며 배우들은 “어두운 색의 무거운 모양”을 좋아하고 부인들은 남편에게 “어두운 색의 안경”을 사라고 권하였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안경이 젊게 보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경은 유행의 극한에까지 이르렀던 것처럼 보이는데 대형의 정방형, 장방형, 팔각형 및 계란형의 줄무늬, 체크무늬, 색깔 없는 것까지 있었다. 결국 안경은 ‘보는 것’보다 오히려 ‘보여지는 것’에 더 치중하게 되었던 셈이다.

3-6. 안경집
중국과 우리나라의 안경집은 모두 끈이 달려 있는 것에 반하여 서양 안경집은 끈이 달려 있지 않고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러한 형태상의 차이는 안경을 휴대할 수 있는 주머니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이나 우리의 전통 옷차림에는 안경을 휴대할 주머니가 거의 없어서 안경집을 허리춤에 차고 다닐 수밖에 없음에 반하여, 서양에서는 간편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었기에 끈이나 수술이 달릴 필요가 없었다. 서구의 복식(服飾)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는 이런 모습은 보기 힘들고 또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안경집 역시 끈이 없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안경이 사용계층의 사회적 신분이나 부를 상징하는 표상(表象)으로서의 기능에 부합되게 안경집 또한 소지한 사람에 따라 그 재질과 문양 등이 달랐다. 당시의 주된 사용계층이 왕족이나 귀족, 성직자와 학자들이었으므로 재질의 가격에 구애받기보다는 품위와 격조를 지킬 수 있는 소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가문의 문장(紋章)이나 유물, 유적 등을 새긴 제품이 많은 것이 특이한 점이다. 고급스런 상아(象牙)나 대모, 금, 은 등과 동물의 뼈나 가죽, 자개, 어피, 밀짚 등을 가공하여 안경집을 만들었으나 금속세공이나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제품이 가장 많았다. 귀중한 안경은 사자라든가 기묘한 괴물 등의 마스크가 그려진 케이스 안에 수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성서의 한 장면이나 종교적인 상징과 같은 것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안경집도 나오게 되었다.

3-7.서양의 안경 문화
초기의 안경 수요자는 상류계급에 속하는 성직자나 학자, 법률가,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13C 말 당시 사회가 귀족 중심의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모든 학문이 그들의 전유물이었으므로 학문과 접촉할 수 없었던 일반대중들은 안경을 이용하지 못하였다. 또한 안경의 높은 가격도 안경의 수요가 상류사회로 몰려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안경이 상류계급의 전유물이 되었으므로 안경은 부와 명예, 학식을 상징하는 표상(表象)이 되었다. 귀족, 왕족, 사제들의 초상화에는 안경이 표식처럼 등장했으며 성경 속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에도 안경이 나타났다.

〈참고문헌〉
¤ 안경사 대관(대한안경사협회, 1986, 대한안경인협회))
¤ 안경의 문화사(Richard Corson, 김하정 역, 2003, 에디터)
¤ 한국문양사(임영주, 1998, 미진사)
¤ 지봉유설(이수광,1614)
¤ 세계의 안경사(이명섭, 1973, 안경)
¤ 옛 안경과 안경집(금복현, 1995, 대원사)
¤ 한국의 전통문양(임영주, 2007, 대원사)

〈참고논문〉
¤ 이명섭, 콘택트 렌즈의 역사, 안경계(1970.1)
¤ 이명섭, 렌즈의 역사, 안경계(1969.7)
¤ 이명섭, 망원경의 역사, 안경계(1970.7)
¤ 이명섭, 안경형태 변천사, 안경계(19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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