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도감

격려사

제목안경과 초상화2022-01-2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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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과 초상화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건강 필수품처럼 사용하고 있는 안경은 무엇보다 그 기능적 측면에서 중요시 되어 왔다. 근시나 원시, 난시를 가진 사람들의 시력 보정이라는 궁극적 기능을 절대시 해온 지난날에 비추어 지금은 그 주기능에 덧붙여 낚시와 등산, 스키, 수영과 같은 특수목적에 적합한 기능을 가진 기능성 안경을 착용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안경의 보급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고 용도가 전문화됨에 따라 시대적 조류와 수요층의 기호에 부응하려는 변화가 있었으니 과학적 합리성과 실용성, 외관상의 멋진 모습을 구가하려는 패션적 감각에까지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안경에 대하여 그 역사나 유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까닭은 백성들은 생활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값비싼 안경을 착용할 수조차 없었고, 선대(先代)가 쓰던 안경은 후대(後代)가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관습이 안경유물의 단절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장유유서(長幼有序)와 반상(班常)의 차이에 따른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현재 전래되는 것이 극히 희소하기 때문이다.

안경은 1200년경 중국에서 커다란 화폐 모양으로 운모와 같은 색깔의 애체(靉靆)라는 안경을 만들었다는 설과 몽고지방에서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이태리에서는 1280년경 베니스의 유리공들이 볼록렌즈를 만들어 교황 클레멘스4세에게 선물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안경은 노인이 책을 볼 때 쓰는 것으로 작은 글자를 크게 보이게 한다. 명나라 장수 심유경과 일본 승려 현소(玄蘇)가 모두 노인용 안경을 쓰고 가늘고 작은 글씨를 읽었다. 안경은 해방(조개이름)껍질로 만든다고 한다. 판별하기 어려운 낡은 문서를 수정으로 햇빛에 비추어 보면 분별할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사용하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안경이 현존하고 있어 1580년경 경주에서 안경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귀하고 값비싼 제품들처럼 안경도 그 사용하는 계층이 왕이나 사대부 계층에 국한되었으나 6.25이후 서구식 안경의 대량공급으로 일반 서민에게 보급되었다. 이러한 안경은 착용하는 자가 위세를 부리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으로 오인되어, 안질이 있어 보호용으로 어전에 안경을 착용하였던 대신이 왕의 미움을 사 종국에는 자살까지 한 사례가 있다. 또, 수신사로 가는 김기수는 우리 사절단의 우월을 과시하기 위하여 일행에게 모두 안경을 쓰게 하였다는 일화만 보아도 당시에는 안경을 쓰는 것이 큰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썬그라스를 착용하는 사람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것은 이와 같은 관습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1600년을 전후하여 책거리(책가도)나 초상화에 안경이 등장하는데 임방(1640-1724)의 초상화에는 검은테에 실다리 안경과 책을 서탁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는 모습이 있고, 화담(1786-1848)대사 초상화에는 화엄경을 보던 중 책 위에 안경을 벗어놓은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궁중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초상화에는 우각테로 만든 꺾다리 안경을 쓴 모습이 보인다. 이밖에도 불화 불암당 회유 진영(18c 중엽)에는 수북이 쌓인 책 위에 놓인 실다리 대모안경이 있는데 산사의 스님도 안경을 착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는 안경의 보급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상화는 특정인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인물의 모습을 표현하는 인물화와 다르다. 그 기능면에서도 정치나 종교적 연관성 등을 표현하는 역사성과 기록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표현기법에 주안점을 둔 인물화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래서 한 점의 초상화라 할지라도 가볍게 여기거나 작품성에만 무게를 둘 수 없고 작화기법의 변화나 주변적인 것에도 비중을 두어야 한다. 시대의 변화와 인간에 대한 인식 자체의 변화를 증명하는 등 인간관계와 미술적 표현양식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단초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초상화의 변천사를 더듬어 볼 필요성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정수 선생이 열과 성을 다하여 수집한 근현대의 초상화 가치는 높을 수밖에 없으며 특히 안경과 관련된 작품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것도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을 가진다는 면에서 상찬해 마지않는다.

초상화는 대상인물의 외모를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개인의 성격이나 인품, 신분과 관련된 기품이나 정기 등을 표현하는데 치중하고 있어 형사(形似)보다 전신(傳神)에 가까운 작품을 최고의 경지로 인정한다. 형사란 대상인물의 체구, 관직, 연령, 귀천 등 외견상 나타나는 요소로 그 대상의 주변적, 외견적 모습을 사실대로 그려내는 것을 말하고, 전신이란 대상인물의 형형(炯炯)한 눈빛이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체취 등이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느낌을 말한다. 전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변적 요소라 하여도 소홀히 처리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상 인물만이 지닌 개성을 나타내는 데에는 주변적인 것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부모의 초상화를 그림에 있어 털끝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다”(人寫父母之眞 一毫一髮不似 則非父母矣 )라고 할 정도로 극도의 사실적 묘사를 중요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 중심의 유교교육에서 오는 정형적 충효사상과 군자중심의 행동양식은 앳된 학동들마저 강요받아 왔기에 소위 구용구사(九容九思)의 근엄한 모습을 최고의 덕목으로 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안색을 엄숙히 하여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衣冠必正 容色必肅 拱手危坐). 볼 때에는 바르게 하고 흘겨보거나 훔쳐보지 않으며(目容端), 입모습은 다물어야 하며(口容止), 머리를 바르게 하고 몸을 곧게 하여 기울여 돌리거나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고(頭容直), 안색을 가지런히 하여 태만한 기색이 없고 근엄하게 하여야 한다(色容莊)는 몸가짐의 이념은 이조시대 사대부 계층을 지배한 덕목이었다.

태어날 때의 모습은 부모가 책임질 문제이지만 40세 내외의 모습은 그 사람의 행동궤적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초상화를 그리는 계층은 왕이나 사대부가 중심이었고 상민들은 풍속화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신분적 행태가 굳어진 이후에 그리는 초상화는 한결같이 고정된 틀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기풍과 가치관에 따라 그런 내용들이 담겨져 전해 내려오는 것이 초상화에는 특히 두드러진다.

우리나라 현대 회화사의 분기점이 되는 1910년대 이전의 초상화는 거의 대부분이 획일화되다시피 그려졌으나 일본 유학파들의 서양적 기법이 유입되면서부터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청대에 융성한 고증학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실학사상이 일어나자 고정된 틀에서 조금씩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변화 자체가 배경이나 의자, 채전 등 아주 부분적이거나 주변적인 것에 국한되어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초상화의 본질적인 요소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사대부의 계급 특성에 따른 사모(紗帽)를 쓰고 붓 모형으로 잘 정제된 수염이 고매한 턱을 치켜든 채 정면을 바라보며, 교의자(交椅子)에 앉아 무릎 위에 주먹을 쥔 두 손, 채전이나 돗자리 등에 단정히 얹은 두 발 등으로 묘사된 초상화는 신분제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가보로 여겨 보존하게 하였다.

이렇게 고정된 틀에 얽매이던 초상화는 사회제도의 변혁과 가치관의 변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회화사조 혁신 등으로 그 표현기법이 달라지면서, 측면에서 그린 것과 웃는 모습 등이 표현되더니 최근에 이르러서는 특정인이 아닌 일반적 인물을 그리는 인물화라는 보다 큰 범주의 장르 속에 묻힘으로써 서서히 그 궤를 마감하게 된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대로 안경과 초상화는 신분제적 사회제도와 맞물려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안경을 사용하는 계층이 왕과 사대부 중심인 것과 마찬가지로 초상화의 대상 인물들 또한 그와 궤를 같이 한다. 뿐만 아니라, 안경의 보급이 서세동점의 영향에 결정적으로 힘입었듯이 초상화 또한 서구 회화사조의 영향으로 그 변화가 본질적인 요소에까지 미치게 되어 보다 넓은 범주의 인물화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적 의식과 중국이나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안경이 그려진 초상화가 이조시대 후기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 역사에 변혁을 가져온 실학사상과 민본주의 사상이 대두된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반 중심적이고 공허한 성리학 논리에만 매달리던 사대부들의 생각이, 서얼의 차별에 희생양이 되던 선비들을 중심으로 깨어나기 시작하여 일상생활 중심의 사조로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문화적 변혁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초상화에 안경을 그려 넣은 것은 대상인물의 전신을 위하여 꼭 필요한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며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던 안경을 벗은 채 초상화를 그린 경우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비쳐진 것도 한 가지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주변적인 요소가 본질적인 이미지와 결부되어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이르렀을 때는 주변적인 요소를 본질적인 요소와 결합하였을 때 대상인물의 전신사조에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기에, 이번에 발표하는 안경과 초상화의 전시는 그 의도가 돋보이며 적절한 발상이라 할만하다.


2009.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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